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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땐 항일독립투쟁 광복후 반독재 통일운동…실천하는 儒林 큰 어른
먼저 반성부터 한다. 기자가 과문(寡聞)했다. 취재 전 기자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선생이 저 유명한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한 경북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다는 정도만 알았다. 그러나 자료를 수집하고 성주 생가를 방문하는 등 취재가 진행되면서 기자에게 심산은 자신의 호(號)처럼 거대한 마음의 산으로 다가왔다. 신념에 따라 불꽃 같은 삶을 살아간 이 시대의 선비였고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가랑잎처럼 스러지다
심산은 1879년(고종 16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김호림(金頀林)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창숙은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려서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문장에 능했다.
심산은 글 읽고 담론만 하는 선비가 아니었다. 청년시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현의 글을 읽고도 그들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짜 선비가 아닐 수 없다." 구한말 국운이 위태로울 때 그는 책만 읽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애국계몽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심산은 '나라 팔아먹은 역적 5명의 목을 베자'는 내용의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疎)를 올리고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한 죄로 옥고를 치른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이 불법 체결되자 심산은 통곡하며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수치"라며 갓 벗고 삿갓 쓴 채 술 마시며 방황했다.
선비로서 심산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19년 독립선언서 발표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림 인사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을 그는 민족적 수치로 생각했다. 조선 정신의 근간이었다는 선비정신이 정작 나라의 위기 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울분을 토했다.
이에 심산은 파리평화회의에 유림의 이름으로 글을 보내 독립을 천명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심산은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이 연명해 쓴 '한국독립청원장서'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당시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이것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파리장서 사건이다.
1920년 귀국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던 심산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왜경에 잡혔다가 출옥한 뒤 중국에 다시 건너가 단재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일제에 요주의 인물이 된 심산은 1927년 일경에 다시 잡혀 14년 옥고를 치렀다. 이때 모진 고문을 받아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자 심산은 스스로에게 '벽옹'(앉은뱅이 늙은이라는 뜻)의 호를 붙였다.
심산은 해방 후 김구와 노선을 같이하며 자주독립운동을 펼친 반면 이승만과 대립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사건으로 심산은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반독재 활동을 펼치다가 1952년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며, 1957년에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됐다.
1962년 5·16 군사혁명 이후 3·1절을 기해 선생은 생존 인물로는 유일하게 국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 5월 10일 노환 끝에 향년 84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시대를 앞서간 진보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심산은 시대를 앞서간 진보주의자이기도 했다.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06년 일본의 차관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의 일환으로 단연(斷煙) 운동이 벌어졌다. 심산은 그러나 모금된 돈이 중앙이 전달되어봤자 매국 역적들의 손에 들어갈 것이 틀림없다 하여 그 돈으로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을 세웠다. 신학문을 사악한 학문이라 하여 배척하던 유생들의 반발도 많았지만, 심산은 신식학교를 통해 인재를 키워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뜻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심산은 1946년에 성균관대학을 세웠으며 초대 학장, 초대 총장을 지냈다.
벼슬을 하고자 했거나 치부를 하려 했다면 족히 그런 능력이 심산에게는 있었지만 그는 대의를 위한 형극의 길을 평생 걸었다. 재산을 모은 일도 없고 말년에는 집도 없이 여관이나 친지의 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보니 가정을 돌볼 여력이 없었고 가정사가 불우했다. 아들 둘을 뒀는데 둘 다 독립운동을 했다. 장남 환기(煥基)는 20살이던 192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고, 둘째 찬기(燦基) 역시 중국 충칭(重慶)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32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심산은 완고하기만 한 선비가 아니었다. 대의에 올곧았지만 인정에는 너그러운 휴머니스트였다.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생가에는 지금도 며느리 손응교(95) 할머니가 살고 있다. 그녀는 17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남편을 일찍 잃고 외아들을 키우며 80년 가까이 수절했다. 다리 불편한 시아버지 수발을 하느라 고생을 하는 수절 며느리에게 심산은 "아가, 혼자 사는 것이 힘들제?"하면서 담배를 가르쳤다.
현재 손 할머니는 허리와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못 걷고 잘 듣지도 못한다. 3등급 장애 진단을 받아 국가의 지원을 받는 요양사의 수발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래도 손 할머니는 "시아버님 생가에서 눈을 감고 싶다"고 말한다. 심산의 후손으로는 손자 김위(73) 씨가 서울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증손자'증손녀가 한 명씩 있다.
◆에피소드들
심산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1927년 왜경에 잡혀 달성감옥에 갇혀 지낼 때의 일이다. 왜경이 그에게 모진 고문과 공갈을 일삼자 심산은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한 뒤 한시 한 수를 써주었다.
'광복 위해 뛰어다닌 십년 세월/ 가정도 생명도 다 팽개쳤노라./ 살아온 나날은 백일(白日)처럼 공명한데/ 괴롭고 다양한 고문이 웬 말이냐.'
이 시를 접한 일본인 과장은 경례를 하며 심산의 대의 앞에 경의를 표하고는 말끝마다 선생이라 불렀고 고문의 강도도 줄였다.
또한 심산은 옥중생활 내내 형무관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왜경의 물음에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종 반말로 묻는 말에 "그렇다" "아니다"라고만 답했다. 재판 때에는 본적을 묻는 재판장에게 "나라 잃은 백성이 본적이 있을 수 있나?"라고 반박했고, 일본이 주선해 준 변호사도 거절했다.
◆에필로그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성주군 박재관(44) 학예연구사는 심산의 인물됨과 업적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은 사람 중에 심산 선생이 가장 덜 알려져 있는 것 같아요. 포털 사이트에서 '김창숙'을 검색하면 (같은 이름의) 탤런트 이름이 맨 위에 뜰 정도입니다."
실천적 지성이라는 면에서 심산에 견줄 만한 위인은 우리 역사에 흔치 않다. 일제 강점기에는 격렬하게 항일독립투쟁을 했고 해방 후에는 치열하게 반독재 민족통일 운동을 벌였다. 평생 자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나랏일에 헌신했다. 다행히 그를 재조명하고 정신을 이어받자는 사업들이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순신, 안중근에 못지않는 걸출한 위인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억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글'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 오페라·마당극·애니메이션으로…心山 재조명 활발
심산 선생이 남긴 모범적 삶과 고귀한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더 발한다. 현재 고향 성주를 비롯해 성균관대를 중심으로 심산 선생에 대한 재조명 및 추모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서울에 (사)심산김창순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중위)가 설립돼 있고, 성균관대 교수들이 중심이 된 심산사상연구회가 조직돼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114-3번지 반포근린공원에는 심산기념문화센터가 건립돼 있다. 지하 2층, 지상3층 연면적 8415㎡ 규모이며, 심산김창순선생기념사업회가 지었다.
최근 들어서는 고향 성주에서 기념 사업이 다양하고 활발하다.
2010년 9월 4일 성주문화예술회관에서는 성주청년유도회 주관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 숭모제'가 열렸다. 학술토론회와 숭모작 헌례, 창작극 공연 등이 이 날 펼쳐졌다.
선생의 뜨거운 나라 사랑 정신은 오페라와 창작 마당극으로도 만들어졌다.
로얄오페라단은 2010년 10월 19일 성주문화예술회관에서 선생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 '심산 김창숙'을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2010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유일한 창작 오페라로 공연됐으며, 올해에는 서울과 대전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될 예정이다. 2009년 12월 5일 성주문화예술회관에서는 별고을광대 주관으로 창작마당극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서니'가 공연됐다. 마당극의 제목은 선생의 시에서 따왔다.
선생의 일대기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다. 지난해 성주군은 애니메이션 '나라를 구한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을 제작해 발표했다. 성주군이 경북테크노파크 정책기획단에 의뢰해 총 1억원을 들여 만든 이 작품에는 선생의 애국계몽운동, 파리장서 사건, 감옥에서조차 일본에 굴하지 않은 기개 등이 담겼다.
사적 공원도 조성된다.
성주군은 대가면 칠봉리 심산 김창숙 선생 생가 일원 30만㎡에 총 300억원의 국비'지방비를 들여 오는 2016년까지 '심산 의열'사적공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생가 주변을 정신문화의 원류로 조성해 역사'문화 유적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사업이다. 여기에는 의열사적관, 유학기념관, 테마공원 등이 들어서며 현재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컨설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김해용기자
◇ 김창숙 선생 주요 연보
1879년 = 음력 7월 10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출생.
1905년 = 서울로 가서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국왕에게 상소.
1909년 = 일본헌병에 체포됨.
1910년 = 전국 단연동맹(斷煙同盟) 성주 대표로 활약.
1919년 =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 보내는 것을 주도함.
1920년 = 신채호 선생과 천고(天鼓) 발간.
1928년 = 일제로부터 14년형 선고받음. 고문으로 다리 마비됨.
1934년 = 병세 위독해 가출옥됨.
1940년 =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 끝내 거부.
1945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출됨.
1946년 = 신탁통치 반대 운동 펼침. 비상 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 추대. 성균관대학 설립'초대학장 취임.
1950년 = 인민군의 사상 전향 요구 거부.
1951년 =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 투옥.
1952년 = 반독재 호헌구국 선언대회 주도해 옥고 치름.
1953년 =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 취임.
1956년 = 성균관대학교 총장직 사임.
1957년 = 자유당 정권의 압력으로 성균관 유도회 등 공직에서 추방됨.
1958년 = 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 지도.
1959년 = 이승만 대통령 사퇴 권고 서한 냄.
1962년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 받음. 5월 10일 서거.
1998년 = 5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됨.
1999년 = 5월 문화인물로 선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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